황규석 회장, “의정 갈등이 전환점… 변화 불가피”

“핵심은 ‘정부와의 신뢰 회복’… 예측 가능한 정책 방향 제시”

“건강보험 제도 전면 재검토… 과감한 재정 투입도 필요”

“의협 역할 중요… 6월말까지 ‘트리플링 방지’ 정책 제시해야”

  서울시의사회가 이재명 정부를 향해 “앞으로 5년간 ‘의료 100년 대계’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책임감을 갖고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고 나섰다.

황규석 서울특별시의사회장은 지난 12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위치한 서울시의사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새 정부는 의정 갈등을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역사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윤석열 정부 시절 의대 정원 증원을 필두로 한 정부의 일방적인 의료개혁 추진으로 세계 최고를 자부하던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은 무너져 내렸고, 의정 갈등 속에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의료·교육 현장을 떠나야 했다.

게다가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의대생들의 수업 거부 사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전국 40개 의대에서 8000여명의 의대생이 집단 유급 판정을 받았고, 이 중 40여명은 제적 위기에 놓였다.

이대로라면 기존 의대 재학생(2024, 2025학번)과 내년 신입생(2026학번)까지 3개 학년이 동시에 1학년 수업을 받는 이른바 ‘트리플링’ 사태가 발생해 의대 교육의 질적 붕괴가 우려되는 실정이다.

황 회장은 “의정 갈등은 단순히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의료 시스템이 바뀌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의료환경에 대대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내다봤다.

이미 4000만 국민이 민간 실손보험에 가입한 상황에서 ‘당연지정제’를 근간으로 한 건강보험 제도를 전면 재검토하는 등 사회 전체의 변화를 아우르는 새로운 의료 시스템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의료계의 ‘신뢰 회복’이 선행돼야 하고, 결국 의정 갈등 사태 해결의 핵심도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 회복에 있다는 게 황 회장의 진단이다.

그는 “젊은 의사들과 의대생들이 의료·교육 현장을 떠난 이유는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며 “의대생 복귀 문제도 ‘복귀하지 않으면 유급’이라는 식의 초법적인 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재명 정부가 ‘의료환경의 대대적인 변화’에 대한 예상을 기반으로 전문가인 의료계와 상의하면서 의료계가 믿고 예측할 수 있는 정책 방향을 제시한다면 젊은 의사들은 물론, 의료계도 새 정부를 믿고 의사 본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황 회장은 과감한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는 제안도 내놨다. 그는 “이국종 교수가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순간에 왜 의사가 거즈의 개수를 세어야 하느냐’고 외친 것처럼, 이런 환경에서는 환자를 살리기 어렵다”며 “이재명 정부는 과감한 의료 재정 투입에 나서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황 회장은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이야말로 의료계의 종주 단체인 대한의사협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쓴소리도 했다. 이제부터라도 의료계가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 의협이 의견을 모으고 정부에 선제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 회장은 현재 의협 부회장도 맡고 있다.

그는 “외부자인 서울시의사회장의 입장에서 볼 땐 의협 집행부의 내부 의견 수렴 구조가 경직돼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지역의사회와의 소통도 거의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며 “내부자인 의협 부회장 입장에서 보더라도 ‘결정의 타이밍’에 계속 문제가 있었고, 대외적인 메시지의 일관성도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12월과 지난 2월, 대선 직전인 5월 말까지 트리플링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최소 세 번은 있었는데, 의협이 책임 있는 결정이나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황 회장은 트리플링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의협이 전공의와 의대생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지 깊게 고민해야 한다는 조언도 내놨다.

그는 “트리플링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기회가 6월 말까지 3주도 남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7월에는 수업이 시작돼야 트리플링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의협에서 6월 말까지 아무런 정책 제시가 없다면 그야말로 무책임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대로라면 의대 대부분이 트리플링 사태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적어도 대학들이 유급·제적 행정 처리를 마치는 1학기 말까지는 의대생들이 복귀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황 회장은 전공의와 의대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도 소개했다.

우선 서울시의사회는 전공의·의대생들의 유급·제적 등에 대응하기 위한 전문가 자문단을 꾸려 법률·행정 자문을 제공할 예정이다. 또한 젊은 의사들이 의료 현장에 복귀하기 전에 기초 진료 경험을 쌓고 임상 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서울시내 2차 병원이나 로컬 네트워크 병·의원과 연계해 임상 연수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의사회는 휴학 중인 의대생들이 복귀하면 장학금을 지원하는 방안과 의정 갈등 사태를 되돌아보기 위한 백일장을 개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아울러 황 회장은 수련 환경에 대한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되돌아보면 선배 의사들은 오프도 없이 주 200시간씩 일했지만, 수많은 의료 현장에서 임상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며 “하지만 수련 환경이 바뀌면서 전공의들이 의료 술기를 배우는 것보다는 행정이나 의료의 보조인력으로 쓰이면서 오히려 ‘기초적인 임상경험 부족’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진료지원(PA) 간호사 과정이 생기면 전공의가 PA의 보조인력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며 “전공의들이 많은 임상경험을 쌓을 수 있는 수련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정부 정책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중소병원이나 2차 병원, 로컬 네트워크 병·의원과 연계한 ‘기초 임상 수련 네트워크’라도 만들어 교육시켜야 한다는 게 황 회장의 주장이다.

더불어 황 회장은 “지난 1년 5개월간 힘들고 고통받은 사람은 전공의와 의대생들”이라며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하루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의료시스템이 정상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우리나라 사회 갈등 속에서 의료계마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며 “이제부터라도 의대 교수와 개원의, 전공의, 의대생들이 다시 하나가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끈끈했던 선후배 관계, 존경하던 교수님, 사랑하는 전공의와 의대생들로 돌아가기 위해 서울시의사회가 최선을 다하겠다”며 “의료계가 하나로 뭉쳐 한목소리로 정부와 대화하고,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 국민들을 설득한다면 두려울 게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